지난 10월 20일 영국 Channel 4에서 방송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의 마지막 장면은 시청자들에게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AI가 직장을 빼앗을 것인가라는 제목의 이 프로그램은 의료와 법률, 패션, 음악 분야에서 인공지능과 인간이 경쟁하는 실험을 다루며 한 시간 동안 진행되었습니다. 프로그램 내내 여러 장소를 오가며 취재 내용을 전달하던 진행자는 침착한 목소리와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시청자들에게 AI 기술의 발전상을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프로그램 종반부에 이르러 진행자는 놀라운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앞으로 몇 년 안에 AI가 모든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칠 것이며 일부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고 말하며, 콜센터 직원과 고객 서비스 상담사는 물론 자신 같은 TV 진행자도 예외가 아니라고 밝혔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실제 인간이 아니라 AI가 생성한 가상의 인물이라는 충격적인 진실을 밝혔습니다. 아이샤 가반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이 진행자는 AI 패션 브랜드 세라핀 발로라와 제작사 칼렐 프로덕션이 공동으로 만든 디지털 인간으로, 실제 촬영 현장에 존재했던 적이 없으며 얼굴과 목소리, 몸짓까지 모두 인공지능 기술로 생성된 것이었습니다. 이는 영국 방송 역사상 처음으로 AI가 프로그램 전체를 진행한 사례로 기록되었으며, Channel 4는 이것이 단순한 기술 과시가 아니라 관객들이 AI의 설득력을 직접 경험하게 하려는 의도적인 연출이었다고 밝혔습니다.

할리우드를 뒤흔든 AI 배우의 등장
Channel 4의 충격적인 실험이 있기 불과 몇 주 전인 9월 말, 할리우드는 또 다른 AI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네덜란드 출신 기업가 엘린 반 데르 벨덴이 만든 AI 배우 틸리 노우드가 실제 탤런트 에이전시와 계약 협상을 진행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연예계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반 데르 벨덴은 취리히 영화제에서 자신이 설립한 AI 스튜디오 파티클6를 통해 틸리 노우드를 차세대 스칼렛 요한슨이나 나탈리 포트만처럼 키우고 싶다고 밝혔으며, 여러 에이전시가 이미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인스타그램에서 5만 명 이상의 팔로워를 확보한 틸리 노우드는 2분짜리 코미디 단편 AI 커미셔너에 출연한 것이 전부였지만, 마치 실제 신인 배우처럼 소셜미디어에서 활동하며 자신의 연기 경력을 쌓아가고 있었습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할리우드 배우들은 즉각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골든글로브 수상자 에밀리 블런트는 이를 정말 무섭다고 표현했으며, 아카데미 수상자 우피 골드버그는 AI 배우가 수천 명의 배우 데이터를 학습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불공정한 경쟁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영화 매틸다로 유명한 배우 마라 윌슨은 수백 명의 젊은 여성 배우들의 얼굴을 합성해 만든 틸리 노우드를 고용하는 대신 왜 실제 배우들을 쓰지 않느냐며 분노를 표했습니다. 미국 배우 조합인 SAG-AFTRA는 공식 성명을 통해 창의성은 인간 중심이어야 하며 조합은 합성 인물이 인간 배우를 대체하는 것에 반대한다고 밝혔습니다. 조합은 틸리 노우드가 배우가 아니라 수많은 전문 배우들의 작품을 허락 없이 학습한 컴퓨터 프로그램이 만든 캐릭터일 뿐이며, 삶의 경험도 감정도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경제성과 진정성 사이의 줄다리기
AI 진행자와 배우를 둘러싼 논쟁의 핵심은 경제적 효율성과 예술적 진정성 사이의 갈등입니다. 칼렐 프로덕션의 CEO 닉 파네스는 AI 진행자를 활용하는 것이 매주 더 경제적이 되고 있으며, 생성형 AI 기술이 매일 발전하면서 진행자의 설득력도 날마다 높아지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는 제작비 절감과 24시간 가동이 가능하다는 명백한 장점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Channel 4의 뉴스 및 시사 부문 책임자 루이자 콤프턴은 AI 진행자 활용을 습관화하지 않을 것이며, 방송사의 초점은 여전히 사실 확인과 공정성, 신뢰성을 갖춘 고품질 저널리즘에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녀는 이번 실험이 AI의 파괴적 잠재력과 시청자들이 검증할 방법이 없는 콘텐츠로 얼마나 쉽게 속을 수 있는지를 상기시키는 유용한 경고였다고 설명했습니다. 실제로 일부 시청자들은 진행자의 입 주변이 흐릿하게 보인다는 점을 지적하며 AI일 가능성을 의심했지만, 대부분의 시청자는 프로그램 마지막 순간까지 진행자가 실제 인물이라고 믿었습니다. 업계 내부에서도 의견이 엇갈립니다. 일부 탤런트 에이전트는 AI 캐릭터를 고객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며 소셜미디어의 등장과 같은 변화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다른 에이전트들은 AI가 홍보 담당자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인간 배우를 대표하는 것이 자신들의 본질이라고 강조하며 선을 긋고 있습니다. 영국의 유명 뉴스 앵커는 AI가 아직 생방송 저널리즘을 수행하기에는 상당히 부족하며, 경험과 지식, 인간적 공감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분석하며 반응하는 능력을 복제하기는 어렵다고 지적했습니다.
방송계가 맞이할 새로운 국면
영국과 할리우드에서 벌어진 이 두 사건은 전 세계 방송계와 연예계에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한국에서도 AI 기술을 활용한 가상 인플루언서들이 이미 활동하고 있으며, 일부 기업들은 AI 모델을 광고에 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방송 프로그램을 진행하거나 드라마에 출연하는 수준의 AI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Channel 4의 실험은 기술적으로 이미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틸리 노우드 논란은 그러한 시도가 얼마나 큰 사회적 반발을 불러올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방송계는 이러한 변화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우선 AI 활용에 대한 명확한 윤리 기준과 가이드라인이 필요합니다. Channel 4가 프로그램 끝에 진실을 공개하며 투명성을 유지했던 것처럼, 시청자를 속이지 않는 것이 첫 번째 원칙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방송인과 배우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제도적 장치도 마련되어야 합니다. SAG-AFTRA가 보여준 것처럼 노조와 업계 단체의 역할이 중요하며, AI가 인간 배우의 얼굴과 목소리를 무단으로 학습하는 것을 막는 법적 근거도 필요합니다. 동시에 AI 기술의 긍정적 활용 가능성도 열어두어야 합니다. Channel 4는 과거 다큐멘터리에서 인터뷰 대상자의 신원을 보호하기 위해 AI를 활용한 적이 있으며, 역사적 재현 장면에서도 AI 활용을 실험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처럼 AI는 창작자들의 도구로서 유용하게 쓰일 수 있지만, 인간을 완전히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보조하는 역할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 업계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AI 시대의 방송과 영상 콘텐츠는 기술의 효율성과 인간의 창의성, 경제적 이익과 예술적 가치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아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논의가 기술 전문가나 업계 관계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시청자와 대중 전체가 함께 고민해야 할 주제라는 점입니다. AI가 만든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어떤 기준을 가져야 하며, 어디까지를 허용하고 어디서부터 선을 그어야 하는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Channel 4의 실험이 던진 질문은 단순히 AI 기술이 얼마나 발전했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미래를 원하는가에 관한 것이며, 그 답은 결국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