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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가 냉각기 회사를 산 진짜 이유

by 현큐레이터 2025. 11. 9.

삼성전자가 2025년 5월 14일 독일의 냉난방공조 전문기업 플랙트그룹을 약 2조 4천억 원에 인수했습니다. 8년 만의 최대 규모 인수합병이며, 2017년 자동차 전장 업체 하만을 인수한 이후 가장 큰 빅딜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스마트폰과 반도체를 만드는 삼성전자가 왜 갑자기 에어컨 회사를 샀을까요. 그것도 2조 원이 넘는 돈을 들여서 말입니다. 하지만 이 인수는 우연이 아닙니다. 지금 세계는 AI 데이터센터 열풍으로 뜨거워지고 있고, 그 뜨거움을 식히는 냉각 기술이 금맥으로 떠올랐습니다. 플랙트그룹은 1918년 설립된 100년 넘은 유럽 최대 공조 기업으로, 데이터센터, 공장, 병원, 공항 등에 중앙공조 시스템을 공급합니다. 연간 7억 유로 이상의 매출을 올리며 65개국에 제품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10여 개 생산거점과 유럽, 미주, 중동, 아시아를 아우르는 판매망을 보유했고, 터널과 선박용 환기 시스템을 만드는 우즈, 공기조화 솔루션 전문 셈코, 빌딩 제어 자동화 회사 SE-Elektronic 같은 자회사들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플랙트가 글로벌 초대형 AI 인프라 구축 프로젝트인 스타게이트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공기냉각과 액체냉각을 아우르는 AI 데이터센터용 솔루션을 개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삼성전자와 플렉트그룹

AI가 만든 새로운 금맥, 데이터센터 냉각 시장

ChatGPT를 비롯한 생성형 AI 서비스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전 세계 데이터센터 투자가 급증했습니다. 문제는 AI 모델을 학습시키고 구동하는 GPU가 어마어마한 열을 발생시킨다는 점입니다. 기존 데이터센터는 랙당 5킬로와트에서 10킬로와트 정도의 전력을 소비했지만, AI 데이터센터는 랙당 수십 킬로와트를 넘어서며 전력 소비가 기존보다 10배 이상 늘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전기를 쓰면 당연히 열도 폭발적으로 발생합니다. 고성능 GPU 칩들이 모여있는 서버는 마치 작은 화로처럼 뜨거워지고, 이 열을 제대로 식히지 못하면 장비가 고장나거나 성능이 떨어집니다. 글로벌 시장조사 기관들의 분석을 보면 데이터센터 냉각 시장의 성장세가 얼마나 놀라운지 알 수 있습니다. 2025년 약 108억 달러였던 시장이 2031년에는 251억 달러로 커지며 연평균 15퍼센트 성장할 전망입니다. 다른 조사에서는 2024년 168억 달러에서 2032년 424억 달러로 성장한다고 분석했고, 또 다른 전망에서는 2023년 184억 달러에서 2036년 1,174억 달러까지 확대되며 연평균 15.3퍼센트 성장한다고 예측했습니다. 어느 자료를 봐도 냉각 시장은 매년 두 자릿수 성장률을 기록하며 빠르게 커지고 있습니다. 특히 액체냉각 시장은 더욱 빠르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2023년 44억 5천만 달러였던 시장이 2033년 399억 달러 규모가 될 것으로 예측되며, 액침냉각 시장도 2025년 16억 달러에서 2034년 72억 달러로 커질 전망입니다. 공기로 식히는 방식만으로는 한계가 있어서, 물이나 특수 액체를 사용해 직접 칩을 냉각하는 기술이 주목받고 있는 것입니다. 지역별로 보면 북미가 여전히 가장 큰 시장이지만, 아시아 태평양 지역이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한국, 일본, 싱가포르처럼 고온 다습한 기후를 가진 나라들은 공기냉각 효율이 떨어져 액체냉각 도입이 더 빠르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시스템에어컨에서 데이터센터 냉각 강자로

삼성전자는 그동안 가정용과 상업용 시스템에어컨 중심의 개별공조 사업을 해왔습니다. 우리가 집이나 사무실에서 쓰는 벽걸이 에어컨이나 천장형 에어컨 같은 제품들 말입니다. 이 분야에서 분명 강점이 있지만, 데이터센터나 대형 공장처럼 건물 전체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냉각하는 중앙공조 시장에서는 존재감이 약했습니다. 플랙트 인수로 삼성전자는 이 빈 공간을 단숨에 채웠습니다. 이제 개별공조와 중앙공조를 모두 갖춘 종합 공조 기업이 된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타이밍입니다. 전 세계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는 2023년 55기가와트에서 2030년 219기가와트로 약 4배 증가할 전망이고, 그중 AI 데이터센터 수요는 연평균 33퍼센트라는 가파른 속도로 성장해 2030년 전체 수요의 70퍼센트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한국만 봐도 AI 컴퓨팅, 클라우드, 통신 수요 증가로 대규모 데이터센터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국내 데이터센터 시장은 2024년 대비 연평균 13.13퍼센트 성장해 2028년까지 약 10조 원 규모로 커질 것으로 전망됩니다. 삼성전자는 플랙트의 고정밀 공조 제어 시스템과 자사의 AI 기반 빌딩 통합 제어 플랫폼인 스마트싱스 프로를 결합해 더 똑똑한 냉각 솔루션을 만들 계획입니다. 예를 들어 AI가 실시간으로 데이터센터 내부 온도와 습도를 모니터링하면서 자동으로 냉각 시스템을 조절해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방식입니다. 또한 플랙트가 가진 유럽, 북미 지역의 촘촘한 판매 네트워크를 활용해 글로벌 시장 공략도 강화할 수 있습니다. 특히 공장, 병원, 바이오 설비처럼 대형 산업 공조 수요가 큰 북미와 유럽 시장에서 발판을 마련한 셈입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이미 미국 공조업체 레녹스와 합작법인을 설립해 북미 시장 공략에 나섰고, 이번 플랙트 인수로 유럽까지 확보하며 전 세계 주요 시장을 모두 커버하게 됐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만들어지는 미래 경쟁력

많은 사람들은 삼성전자 하면 갤럭시 스마트폰이나 반도체를 떠올립니다. 실제로 이 두 사업이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삼성전자가 최근 몇 년간 추진한 인수합병을 살펴보면 다른 그림이 보입니다. 2024년 협업 로봇 회사 레인보우로보틱스를 인수했고, 같은 해 하만을 통해 마시모 오디오 사업부를 인수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플랙트까지, 모두 직접적으로 스마트폰이나 반도체와 관련 없어 보이는 분야입니다. 그런데 이 기업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미래 성장 산업의 인프라를 제공한다는 점입니다. 로봇은 제조 자동화와 물류 혁신에, 오디오는 자동차 전장 시장에, 그리고 냉각 시스템은 AI 인프라에 꼭 필요한 기술입니다. 삼성전자는 눈에 보이는 제품만 만드는 회사가 아니라, 미래 기술이 돌아가는 데 필요한 보이지 않는 인프라까지 장악하려는 전략을 펼치고 있습니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AI 데이터센터에 수조 원씩 투자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 데이터센터를 시원하게 유지해줄 냉각 기술을 가진 기업을 소유한다는 것은 엄청난 경쟁력입니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메타 같은 거대 기술 기업들이 모두 데이터센터 확장에 나서고 있고, 한국에서도 네이버, 카카오, KT 같은 기업들이 AI 데이터센터 구축에 수천억 원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곳이 플랙트의 잠재 고객입니다. 노태문 삼성전자 DX부문장 직무대행은 플랙트 인수가 글로벌 공조 시장을 주도하며 고객들에게 혁신 솔루션을 제공하기 위한 전략적 결정이라고 밝혔고, 앞으로 고성장이 예상되는 공조사업을 미래 성장동력으로 육성하겠다고 강조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삼성전자가 에어컨 회사를 샀다는 이야기지만, 실제로는 AI 시대의 숨은 금맥을 선점한 것입니다.

삼성전자의 플랙트 인수는 제품을 파는 회사에서 플랫폼을 제공하는 회사로 변화하려는 움직임입니다. AI 시대에는 GPU를 만드는 회사만 돈을 버는 게 아닙니다. 그 GPU를 시원하게 유지해주는 회사도,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회사도, 데이터를 빠르게 전송하는 네트워크를 만드는 회사도 모두 함께 성장합니다. 삼성전자는 지금 그 생태계 전체를 바라보며 움직이고 있습니다. 2조 4천억 원이라는 금액이 크게 느껴질 수 있지만, 앞으로 수십 년간 성장할 냉각 시장을 생각하면 오히려 저렴한 투자일지도 모릅니다. 결국 기술의 미래는 눈에 보이는 화려한 제품이 아니라, 그것을 작동시키는 보이지 않는 인프라에서 결정됩니다.